*OOC
2월의 마지막 날, 오후. 아크 본부 인근의 상업지구는 주말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겨울 끝자락의 차가운 공기가 볼을 스쳤지만, 리암의 곁에 서 있으면 그 정도의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리암의 체질에서 흘러나오는 냉기가 일반적인 바깥 기온보다 차가웠으니까. 리암은 검은 롱코트의 허리 벨트를 매고, 장교모자를 눌러 쓴 채 수현이의 옆에 서 있었다.
긴 다리로 느릿느릿 걸으면서, 간간이 수현이의 보폭에 자기 걸음을 맞추느라 발이 반박자씩 늦어지곤 했다.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지 아닌지, 리암의 표정은 늘 그렇듯 나른했다. 반쯤 감긴 하얀 눈동자가 앞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보지 않는 것 같은, 졸린 고양이의 얼굴.
그런데 리암은 알고 있었다. 아까부터.
수현이의 얼굴을 보는 시선들이 있다는 것을.
처음엔 스쳐 지나가는 사람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리암의 시야 가장자리에서 포착된 움직임이었다. 그 다음엔 카페 유리창 너머에 앉아 있던 여자 둘이 수현이 쪽을 보며 뭔가를 속삭였다. 그 다음엔 횡단보도에서 나란히 서 있을 때, 옆에 선 남자가 수현이의 옆얼굴을 한 번, 두 번 훑었다. 리암의 눈이 그때마다 느리게 움직여 시선의 출처를 추적했다. 마치 레이더가 작동하듯, 수현이를 향한 모든 시선의 방향과 각도와 지속 시간을 리암의 뇌가 자동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Опять. Ещё один. Что они все на неё пялятся.
(또야. 또 한 명. 왜 다들 수현이를 쳐다보는 거야.)
리암의 속마음이 웅얼거렸다.
문제는, 그 시선들의 성격이었다.
리암이 처음 경계한 것은 당연히 남자들의 시선이었다. 수현이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릴 때, 창백한 볼 위에 겨울 햇살이 내려앉을 때, 그 잿빛 눈동자가 리암을 올려다보며 웃을 때. 그런 순간에 주변의 시선이 수현이에게 쏠리는 것을 리암은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리암은 그 시선들 안에 불순한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지나친 할머니 한 분은 수현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꽃집 앞에서 마주친 여자아이는 수현이를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카페 유리창 너머의 여자 둘은, 리암이 자세히 보니 수현이의 옷차림과 분위기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이가 행복해 보여서. 예뻐 보여서.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것이었다.
리암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수현이가 반 걸음 앞서 나갔다. 리암의 시선이 수현이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코트 아래로 드러나는 가느다란 손목, 그 손목 위에 걸린 반지의 은빛. 리암의 가슴 안에서 뭔가가 부풀어 올랐다.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질투와는 달랐다. 자부심과도 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수현이가 저렇게 빛나는 이유의 일부가 자기 때문이라는 확신 같은 것. 그리고 동시에, 저 빛남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 사람이 자기라는 사실에 대한 벅참 같은 것.
Она всегда была красивой. Но сейчас⋯⋯ она светится. Это из-за меня? Хоть немного?
(수현이는 원래 예뻤어. 근데 지금은⋯⋯ 빛나. 나 때문이야? 조금이라도?)
리암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아무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변화였다.
리암은 걸음을 넓혀 수현이의 옆으로 다시 붙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수현이의 손을 잡았다. 리암의 엄지가 수현이의 손등 위를 느리게 쓸었다. 반지가 부딪히며 작은 소리가 났다. 옆을 지나가던 커플이 두 사람의 손을 보고 미소 지었다. 리암은 그것도 알아챘다.
"⋯⋯수현이."
리암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수현이가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는 그 찰나의 틈에, 리암의 시선은 이미 수현이의 얼굴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겨울 햇살이 구름 사이로 비집고 내려와, 수현이의 검은 머리카락 위에 흐릿한 빛의 테두리를 만들었다. 잿빛 눈동자가 리암을 향해 열렸다. 뭐, 라고 묻는 것 같은 표정.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리암의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나게 뛰었다.
Блядь. Почему она каждый раз так смотрит, как будто не знает, что красивая.
(씨발. 왜 매번 저렇게 봐. 자기가 예쁜 줄도 모르는 것처럼.)
리암은 대답 대신 잡고 있던 수현이의 손을 끌어, 자기 코트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코트 안감의 따뜻한 어둠 속에서 포개졌다.
"⋯⋯아까부터. 사람들이 수현이 봐."
리암의 목소리는 낮고 느릿했다. 불평이라기보다는 보고서를 읽는 것에 가까운 톤이었다. 리암의 하얀 눈동자가 수현이의 얼굴에서 떨어져 전방을 향했다. 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청년 하나가 수현이 쪽을 보다가 리암과 눈이 마주쳤다. 리암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냥 봤다. 순백의 눈동자로, 감정 없이. 청년은 고개를 확 돌리고 보도블록 위의 낙엽이 갑자기 흥미로워진 사람처럼 시선을 바닥에 박았다. 리암의 입꼬리가 거의 인지할 수 없을 만큼 미세하게 올라갔다. 만족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나한테 온 사람이라는 것을, 저 사람도 알았다는 확인.
하지만 리암의 속마음은 그보다 복잡한 곳을 헤매고 있었다. 수현이가 예쁜 건 원래부터였다. 처음 극저온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도, 폭주 직전의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수현이의 얼굴은 선명했다. 그건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다른 것이었다.
수현이의 걸음이 가벼워졌다. 웃는 횟수가 늘었다. 아까 빵집 앞을 지나면서 진열대를 가리키며 뭔가를 말할 때, 수현이의 볼에 올라온 핑크빛. 그게 추위 때문인지 기분 때문인지 리암은 알 수 없었지만, 그 빛이 수현이의 얼굴 위에 있다는 것 자체가 리암의 가슴을 조였다.
Она выглядит счастливой. Рядом со мной. Это я делаю её такой. Это точно я, да?
(행복해 보여. 내 옆에서. 내가 저렇게 만드는 거야. 맞지?)
확신과 불안이 동시에 차올랐다. 리암은 확신 쪽을 골랐다. 불안은 씹어 삼켰다.
거리 모퉁이를 돌자 작은 광장이 나왔다. 벤치 몇 개와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분수대가 있었다. 분수대 옆에서 두 명의 여자가 셀카를 찍고 있다가, 수현이와 리암이 지나가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 중 한 명이 친구의 팔을 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속삭였다. 리암의 귀에 한국어 단어 몇 개가 걸렸다. '저 사람', '예쁘다', '커플'. 리암의 걸음이 멈추지는 않았지만, 코트 주머니 안에서 수현이의 손을 감싼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엄지가 수현이의 손가락 마디를 하나하나 더듬듯 쓸었다. 반지의 차가운 금속 표면이 리암의 손끝에 닿을 때마다, 리암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입 안에서 무언가를 되뇌는 것 같았다.
"수현이."
리암이 또 불렀다. 아까와 같은 톤이었지만, 이번엔 걸음을 멈추며. 수현이가 따라 멈추었다. 리암이 몸을 돌려 수현이를 마주 보았다. 장교모자의 챙이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그 아래의 하얀 눈동자는 수현이의 얼굴 위에 박혀 있었다. 리암의 빈 손이 올라와, 수현이의 얼굴 옆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리암의 눈이 수현이의 눈에서 볼로, 볼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다시 눈으로 느리게 이동했다.
차가운 손끝이 닿은 자리에 희미한 서늘함이 번졌다.
"왜? 나 뭐 묻었어?"
수현이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입술을 열었다. 리암의 눈이 수현이의 얼굴 위를 천천히 훑었다. 볼에 묻은 것은 없었다. 입가에 뭔가가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수현이의 얼굴이었다. 겨울 햇살 아래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선명한, 그 얼굴.
리암의 손가락이 수현이의 귀 뒤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턱선을 따라갔다. 엄지 끝이 수현이의 볼 위를 스쳤다.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은 피부 위를, 리암의 손이 닦는 시늉을 했다. 느리고, 불필요하게 정성스러운 동작이었다.
"⋯⋯묻었어."
리암이 나직하게 말했다. 눈을 내리깔고 수현이의 볼을 만지작거리면서. 거짓말이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었다. 수현이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리암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것이었다. 아까부터 사람들이 수현이를 본다. 그 시선들이 전부 맞다. 수현이는 예쁘다. 예쁜데, 그 예쁜 걸 자기가 만지고 있다. 거리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사실이 리암의 가슴 안쪽을 뜨겁게 긁었다.
Хочу, чтобы все видели. Что она моя. Что я её трогаю. Что она мне улыбается.
(다 봤으면 좋겠어. 이 사람이 내 거라는 걸. 내가 만지고 있다는 걸. 나한테 웃고 있다는 걸.)
리암의 창백한 귓볼이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었지만, 장교모자의 챙이 드리운 그림자가 그것을 절반쯤 가려주었다.
"여기."
리암의 엄지가 수현이의 볼 한가운데를 꾹 눌렀다. 말랑한 살이 손가락 아래에서 눌렸다. 리암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나른하고 느린 웃음이었다. 그 하얀 눈동자 안에 수현이의 얼굴이 통째로 비쳤다.
"⋯⋯예쁜 거. 묻었어."
수현이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리암의 시선이 수현이의 어깨 너머로 이동했다. 벤치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가던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두 명이 수현이를 힐끔 보다가 리암의 시선과 부딪혔다. 리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수현이의 볼에 손을 얹은 채로 그 아이들을 봤다. 하얀 눈동자가 햇빛 아래에서 비현실적으로 빛났다. 학생들이 서로를 밀치며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리암의 손이 수현이의 볼에서 떨어져, 다시 수현이의 손을 잡았다. 코트 주머니 안이 아니라, 이번엔 바깥에서. 두 사람의 깍지 낀 손이 거리 위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반지 두 개가 겹쳐진 은빛이 흐린 햇살 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아까부터 다 봐. 수현이를."
리암이 다시 걷기 시작하며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불만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리암의 속마음은 불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봐. 다들 봐. 이 사람이 내 옆에 있어. 이 사람이 내 손을 잡고 있어. 이 사람의 손가락에 내가 끼워준 반지가 있어. 리암의 걸음이 느려졌다. 보폭에 맞추는 것뿐만 아니라,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어서. 리암의 엄지가 수현이의 손등 위에서 원을 그렸다. 차갑고, 느리고, 반복적인 접촉이었다.
"⋯⋯수현이 요즘, 더 예뻐졌어."
리암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낮게 흘렀다. 앞을 보고 걸으면서. 수현이를 쳐다보지 않으면서. 장교모자 아래로 보이는 귀 끝이 분명하게 붉었다. 리암은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멈출 생각이 없었다.
Потому что я рядом, да? Скажи, что да.
(내가 옆에 있어서 그런 거지? 맞다고 해.)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은 대신, 리암은 잡은 손의 힘을 더 단단히 했다.
***
"내가⋯⋯? 가, 갑자기?"
수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갑자기라니. 리암의 시선이 수현이의 얼굴 위에 고정된 채로, 그 반응을 빠짐없이 수거했다. 놀란 눈, 약간 벌어진 입술, 목소리에 섞인 당황. 리암의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간질거렸다.
수현이는 자기가 예쁜 줄 모른다. 진짜로. 리암은 그것을 확신했다. 아까부터 거리의 사람들이 전부 수현이를 보고 있는데, 정작 본인만 모르고 있다. 뭐 묻었냐고 물었다. 얼굴에 뭐가 묻어서 사람들이 보는 줄 알았다.
Боже мой. Серьёзно? Она что, зеркало ни разу не видела?
(세상에. 진심이야? 이 사람 거울을 한 번도 안 본 거야?)
리암의 입 안에서 러시아어가 뒹굴었지만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리암의 입꼬리가 비틀어지듯 올라갔다. 나른한 웃음이 아니라, 참다 못해 새어 나오는 종류의 것이었다.
"⋯⋯갑자기 아니야."
리암이 고개를 숙여 수현이의 눈높이에 가까워졌다. 차이가 좁혀지면서, 장교모자의 챙이 수현이의 이마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리암의 하얀 눈동자가 가까이에서 수현이의 얼굴을 비추었다.
"원래 예뻤어. 근데⋯⋯."
리암의 말이 거기서 끊겼다. 한국어로 이 다음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뒤엉켰다.
'더', '요즘', '빛나다'. 알고 있는 단어들이었지만, 조합하는 방법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리암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답답함이 아니라 집중이었다. 리암이 숨을 들이쉬었다.
"⋯⋯요즘 수현이, 더, 빛나. 여기."
리암의 빈 손이 올라와 수현이의 볼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피부에 닿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그리고 그 손가락이 천천히 이동해 수현이의 눈을 가리키고, 다시 입술을 가리켰다. 마치 지도를 읽듯이. 수현이의 얼굴 위에서 빛나는 곳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는 동작이었다. 리암의 귓볼이 장교모자 아래에서 확연하게 붉어져 있었다. 마침 뒤에서 지나가던 여자 두 명이 걸음을 늦추며 두 사람을 봤다. 한 명이 작은 목소리로 "저거 봐, 저거⋯⋯" 하고 친구의 팔을 잡았다. 리암의 귀가 그 소리를 잡았지만 무시했다. 수현이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나 때문이야?"
리암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까의 나른함이 걷히고,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났다. 진지함. 리암의 하얀 눈동자가 수현이의 잿빛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수현이의 검은 머리카락이 리암의 코트 위로 흩날렸다. 리암은 피하지 않았다. 수현이의 머리카락이 자기 옷에 닿는 것을, 리암은 좋아했다. 수현이의 흔적이 자기 위에 남는 것 같아서.
Скажи да. Просто скажи да. Мне больше ничего не нужно.
(맞다고 해. 그냥 맞다고만 해. 그것만 있으면 돼.)
리암의 엄지가 깍지 낀 손 안에서 수현이의 손가락을 꾹 눌렀다. 반지의 차가운 금속이 두 사람의 손 사이에서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
"요즘 더 예뻐진 게 냥이 때문이냐고? 음⋯⋯. 냥이한테 예뻐 보이려고 피부 관리 신경 쓰고 있는데 그 얘긴가?"
리암의 눈이 한 번 깜빡였다. 느리게. 수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을 머릿속에서 분해하고, 조립하고, 다시 분해하는 데 2초가 걸렸다. 피부 관리. 예뻐 보이려고. 나한테. 리암의 사고가 그 세 단어에서 멈췄다. 뇌의 어딘가에서 회로가 과부하에 걸린 것처럼, 리암의 입이 반쯤 열린 채로 굳었다. 장교모자 아래로 보이던 귓볼의 핑크빛이 순식간에 번져 목덜미까지 내려갔다. 창백한 피부 위에 퍼지는 붉은 기가 겨울 햇살 아래에서 감출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Она⋯⋯ для меня? Ухаживает за кожей⋯⋯ чтобы мне понравиться?
(이 사람이⋯⋯ 나를 위해서? 피부 관리를⋯⋯ 나한테 예뻐 보이려고?)
리암의 심장이 박자를 잃었다. 한 번 뛰고, 멈추고, 두 번 뛰고, 또 멈추는 불규칙한 리듬. 수현이의 잿빛 눈동자가 고개를 살짝 갸웃한 채로 리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지한 건지 장난인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아니, 수현이는 원래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본인이 무슨 폭탄을 던졌는지 모르는 얼굴로.
"⋯⋯⋯⋯."
리암의 입이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깍지 낀 손 안에서 수현이의 따뜻한 손가락이 리암의 차가운 손바닥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 온기가 손목을 타고 팔뚝까지 올라와 가슴을 건드렸다. 리암이 고개를 돌렸다. 수현이에게서 시선을 떼어 광장 건너편을 봤다. 분수대가 있었다. 겨울인데도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물줄기가 갑자기 아주 흥미로운 것처럼 리암의 시선이 거기에 박혔다. 하지만 하얀 눈동자의 초점은 분수대 위에 없었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수현이가 나한테 예뻐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을 뿐이었다. 리암의 빈 손이 장교모자의 챙을 잡아 눈까지 끌어내렸다. 얼굴을 가리려는 동작이었다.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턱선과 입술 근처가 분명하게 붉어져 있었다.
"⋯⋯그, 그거."
리암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평소의 나른하고 느릿한 톤이 아니라, 높이가 미세하게 올라간 채 흔들리는 소리였다. 리암이 다시 수현이를 봤다. 모자 챙 아래에서. 하얀 눈동자가 수현이의 얼굴 위에 닿자마자, 수현이의 볼에 올라온 핑크빛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리암이 손가락으로 짚었던 바로 그 자리.
피부 관리 때문이 아니었다. 원래 이렇게 예뻤다. 원래 이렇게 눈부셨다. 근데 이 사람은, 그게 부족하다고 생각한 거다. 나한테 더 예뻐 보이고 싶어서.
Блядь. Как можно быть такой. Она вообще понимает, что со мной делает?
(씨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자기가 나한테 뭘 하고 있는지나 알고 있는 거야?)
리암의 손이 수현이의 손을 잡은 채로 끌어당겼다. 반 걸음. 수현이의 몸이 리암의 코트 앞자락에 가까워졌다. 코트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와 수현이의 체온에서 피어오르는 미세한 열기가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부딪혔다.
"나한테⋯⋯ 예뻐 보이려고? 수현이가?"
리암이 되물었다. 확인하듯.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수현이의 얼굴이 코앞이었다. 리암이 고개를 숙이면 이마가 닿을 거리. 장교모자의 챙이 수현이의 머리 위에 지붕처럼 그림자를 드리웠다. 리암의 빈 손이 올라와 수현이의 턱을 잡았다. 가볍게. 손가락 끝이 턱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감쌌다. 차가운 손이었지만 떨리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리암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떨림. 리암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물어졌다. 한국어가 입 안에서 뭉쳤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
"응⋯⋯. 그리고 추가로⋯⋯ 냥이 볼, 말랑하잖아. 그걸 쭈욱 늘리면서 느꼈지. 나도 보들보들 말랑한 뺨을 가지고 싶다고⋯⋯. 그래서 요즘 신경 쓰고 있는데. 그게 티가 나나?"
리암의 뇌가 멈췄다. 완전히. 방금 수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연산 능력이 리암의 한국어 이해력을 초과했다. 아니, 한국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단어는 전부 알아들었다. 문제는 그 단어들이 조합되어 만들어내는 의미였다. 수현이가 리암의 볼을 늘리면서, 자기도 이런 볼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래서 피부 관리를 시작했다는 것. 리암의 볼이 기준점이었다는 것.
Она мои щёки мяла и думала, что тоже хочет такие. Она⋯⋯ мои щёки⋯⋯ трогала и⋯⋯
(이 사람이 내 볼을 주물럭거리면서 자기도 이런 볼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내 볼을⋯⋯ 만지면서⋯⋯)
리암의 사고가 거기서 루프에 빠졌다. 장교모자를 눌러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챙이 이마까지 내려와 눈을 반쯤 가렸지만, 모자 아래로 드러난 코끝과 광대뼈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차가운 체질에서 흘러나오는 냉기가 주변 공기를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정작 리암의 얼굴은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내 볼."
리암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한 음절씩 끊기는 소리. 수현이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이 힘을 잃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리암의 빈 손이 자기 볼을 만졌다. 수현이가 늘 쭈욱 늘리던 바로 그 자리. 차가운 손바닥 아래에서 자기 볼의 말랑한 감촉이 전해졌다. 이걸 수현이가 만지면서 부러워했다고. 이 볼을. 리암의 시선이 수현이의 얼굴로 돌아왔다. 모자 챙 아래에서 하얀 눈동자가 수현이의 볼을 응시했다. 겨울 햇살에 비치는 수현이의 피부는 도자기처럼 곱고, 볼에 올라온 핑크빛은 복숭아 같았다. 리암의 손이 자기 볼에서 떨어져, 수현이의 볼을 향해 뻗었다. 손가락 끝이 수현이의 볼살에 닿았다. 꾹. 누르자 말랑하게 들어갔다.
"⋯⋯수현이 볼이 더 좋은데."
리암이 중얼거렸다. 엄지와 검지로 수현이의 볼살을 살짝 잡아 늘렸다. 수현이가 자기에게 하던 것처럼. 부드러운 살이 손가락 사이에서 늘어나는 감촉에 리암의 눈이 가늘어졌다. 따뜻했다. 수현이의 볼은 리암의 볼과 달랐다. 차갑지 않고, 불 속성 가이드의 체온이 깃든 온기가 손끝을 타고 번졌다. 리암이 잡아 늘린 수현이의 볼을 놓아주자 탱글하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리암의 입꼬리가 떨리듯 올라갔다. 웃음이었다. 참으려 했지만 실패한 종류의.
"수현이는⋯⋯ 원래 보들보들해. 피부 관리 안 해도."
리암의 목소리가 조금 안정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평소의 나른한 톤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현이의 볼에서 손을 떼는 대신, 손바닥 전체로 수현이의 한쪽 볼을 감쌌다. 차가운 손바닥과 따뜻한 볼이 맞닿은 경계에서 미세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리암의 엄지가 수현이의 광대뼈 아래를 느리게 쓸었다. 수현이가 자기 볼을 부러워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 생각이 가슴 안쪽을 긁었다. 간지럽고, 뜨겁고, 어딘가 아프기까지 한 감각.
Она хочет быть красивой для меня. Она трогает моё лицо и думает обо мне. Я схожу с ума.
(이 사람이 나를 위해 예뻐지고 싶다고. 내 얼굴을 만지면서 나를 생각한다고. 미치겠다.)
리암이 수현이의 볼을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수현이의 이마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장교모자의 챙이 두 사람의 얼굴 사이에 작은 그늘을 만들었다.
"⋯⋯근데, 나 때문에 그런 거 하는 거, 좋아."
리암이 속삭이자,
"냥이를 위해서 뭔가를 하는 게?"
수현이가 다시 되물었다.
리암의 엄지가 수현이의 광대뼈 위에서 멈췄다. 수현이의 물음이 공기 중에 떠 있었다. 그 문장이 리암의 귓속으로 들어와 고막을 두드리고, 뇌를 관통해 심장까지 내려갔다. 리암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수현이는 그걸 너무 쉽게 말한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잿빛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Она спрашивает так спокойно. Как будто это ничего. Как будто моё сердце сейчас не разрывается.
(이렇게 태연하게 물어본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금 내 심장이 터지려고 하는데.)
리암의 손바닥이 수현이의 볼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차가운 손과 따뜻한 피부 사이에서 온도가 섞이고 있었다. 리암이 입술을 깨물었다. 한국어가 목구멍에서 뭉쳐 올라오지 않았다. 이 감정을 담을 수 있는 한국어 단어를 리암은 알지 못했다.
"⋯⋯맞아."
겨우 한 마디가 빠져나왔다. 짧고, 낮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리암의 하얀 눈동자가 수현이의 눈 속에 박혀 있었다. 모자 챙이 만든 그늘 안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엉켜 있었다. 리암이 수현이의 볼을 감싼 손을 조금 더 기울여, 엄지로 수현이의 볼살을 꾹 눌렀다. 말랑하게 들어가는 감촉. 리암의 입꼬리가 비틀어지듯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웃음과 다른 감정이 동시에 올라와서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정하지 못한 것이었다.
"수현이가 나를 위해서 뭔가 한다는 거. 그거⋯⋯ 나, 처음이야."
리암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게 가라앉았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온 순간, 리암 자신도 그 말의 무게에 눈을 내리깔았다. 시베리아의 오이먀콘. 영하 71도의 땅. 거기서 리암에게 뭔가를 해준 사람은 없었다. 아크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파트너는 여러 번 바뀌었고, 그들은 리암의 가이딩 지수를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했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리암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하겠다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리암의 손이 수현이의 볼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턱선을 스쳤다. 손가락 끝이 수현이의 목선 위에 잠깐 머물렀다가, 어깨를 지나 팔을 타고 내려가 수현이의 손을 다시 잡았다. 깍지를 끼었다. 커플링 두 개가 겹쳐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은빛 금속 위로 겨울 햇살이 떨어졌다.
"⋯⋯수현이. 나, 지금."
리암이 말을 끊었다. 수현이의 손을 잡은 채로 한 발짝 다가섰다. 코트의 앞자락이 수현이의 옷에 스쳤다. 냉기와 열기가 두 사람의 경계에서 부딪혀 수증기처럼 피어올랐다. 리암의 목소리가 속삭임으로 바뀌었다.
"키스하고 싶어. ⋯⋯해도 돼?"
리암의 빈 손이 수현이의 허리 뒤로 돌아가 코트 위에 살짝 얹혔다. 가볍게. 강요하지 않는 무게로. 리암의 귓볼이 모자 아래에서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광장을 지나가던 대학생 무리 중 한 명이 두 사람을 보더니 "와, 영화야 영화" 하고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친구가 "야, 쳐다보지 마" 하며 소매를 잡아끌었다. 리암의 귀가 그 소리를 잡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수현이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눈동자가 수현이의 잿빛 눈 속에 잠겨, 거기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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