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netrol freak…
0320

 처음에는 사소한 것이었다.

 리암이 훈련장에서 돌아왔을 때, 션이 복도 끝에 서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다만, 리암이 훈련장 문을 나서자마자 션이 곧장 다가와 리암의 소매를 잡았다. 리암이 고개를 기울여 내려다보니, 션의 잿빛 눈동자가 리암의 가슴팍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리암의 검은 센티넬 제복 위에 얹힌 션의 손가락이 소매 끝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리암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손. 커플링의 은빛 반지가 형광등 빛에 반짝였다. 리암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수현이가 마중 나온 건가. Милая.(귀여워.) 리암의 차가운 손이 수현이의 손 위에 포개졌다.

 "수현이, 마중 나왔어?"

 리암이 묻자 션이 고개를 들었다. 잿빛 눈동자가 리암의 하얀 눈과 마주쳤을 때, 거기에 평소의 느긋한 웃음기가 없었다. 대신 뭔가 확인하려는 듯한, 리암의 존재를 검수하는 듯한 시선이 있었다. 리암의 입꼬리가 멈추었다. 뭔가 달랐다. 수현이의 눈이 리암의 얼굴 위를 훑었다. 이마, 볼, 턱선, 목. 상처가 없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리암은 훈련이었을 뿐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훈련 누구랑 했어?"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러웠다. 상냥했다. 그런데 질문의 결이 달랐다. '어땠어'가 아니라 '누구랑'이었다. 리암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훈련 파트너를 묻는 건가. 리암의 머릿속에서 한국어 어휘들이 느리게 정렬되었다.

 "⋯⋯에이전트. 그, 바람속성 센티넬. 이름⋯⋯ 기억 안 나."

 리암이 대답하자, 션의 손가락이 리암의 소매를 쥔 힘이 미세하게 강해졌다. 한 박자. 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웃고 있었다.냥한 미소. 그런데 리암은 시베리아의 오지에서 자란 동물이었다. 공기의 온도가 바뀌면 알았다. 지금 수현이의 웃음 아래에서, 무언가가 미세하게 차가워지고 있었다. 감정의 온도가.

 "그렇구나. 다쳤어?"

 "아니."

 "다행이다."

 션이 웃었다. 리암의 소매를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션이 리암의 옆에 바짝 붙었다. 어깨가 리암의 팔에 닿았다. 복도를 지나가던 에이전트 한 명이 둘을 보고 가볍게 목례했고, 리암이 고개를 까딱 돌려 받으려 했을 때, 션의 손이 리암의 소매에서 팔꿈치 안쪽으로 옮겨갔다. 팔짱을 끼듯. 리암의 움직임을 고정하듯. 리암이 고개를 돌려 션을 내려다보았다. 션은 앞을 보고 걷고 있었다. 표정은 평온했다. 그런데 리암의 팔을 잡은 손의 힘이, 평소의 '옷자락 잡기'와는 질감이 달랐다. 옷자락이 아니라 팔 자체를 잡고 있었다.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리암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양이가 낯선 냄새를 맡았을 때의 표정이었다. 뭔가가 바뀌고 있었다. 수현이에게서. 리암은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다만 수현이의 손이 리암의 팔을 잡고 있는 힘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소유되는 감각. 리암이 좋아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리암은 아무 말 없이, 수현이의 보폭에 자기 걸음을 맞추었다. 긴 다리가 짧은 보폭으로 줄어들었다. 수현이의 검은 머리카락이 리암의 팔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리암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Она ревнует? Или⋯⋯ нет. Не знаю. Но мне нравится.(질투하는 건가? 아니면⋯⋯ 모르겠어. 근데 좋아.)

 그때는 몰랐다. 이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

 

 그것은 며칠에 걸쳐 천천히 쌓였다.

 처음에는 마중이었다. 훈련이 끝나면 복도에 서 있는 션. 리암의 소매를 잡고 나란히 걷는 션. 그것은 좋았다. 리암은 좋아했다. 수현이가 기다려주는 것. 수현이의 손이 리암의 팔에 감기는 것. 소유되는 감각. 고양이가 자기 영역에 묶이는 것처럼, 리암은 수현이의 손길 안에 갇히는 것을 즐겼다. 그 다음은 식사였다. 리암이 식당에서 같은 팀원과 자리에 앉으려 하면, 션이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쟁반을 들고. 웃으면서. "같이 먹자"가 아니라, 리암의 옆자리에 이미 앉아 있었다. 팀원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면, 션이 리암의 팔꿈치를 잡은 채 고개만 까딱 돌려 미소를 지었다. 명문가 아가씨의 완벽한 미소. 그러나 리암의 팔을 놓지 않는 손. 팀원의 시선이 잠깐 그 손 위에 머물렀다가 떠났다. 리암은 그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수현이가 밥을 같이 먹고 싶은 거겠지. Она просто хочет быть рядом.(그냥 곁에 있고 싶은 거겠지.) 리암은 그렇게 넘겼다.

 그 다음은 통신이었다. 리암이 단말기를 확인하면, 수현이의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지금 어디야', '누구랑 있어', '몇 시에 끝나'.

 

 하나하나는 사소했다. 연인이 보내는 자연스러운 안부. 리암은 서툰 한국어로 답장을 보냈다.

 

 '훈련장', '혼자', '6시'.

 

 수현이의 답장은 항상 빨랐다. '알겠어😄' 웃는 이모티콘. 그런데 리암이 답장이 10분 늦으면, 다음 메시지의 톤이 달라졌다. 이모티콘이 사라졌다. '니콜라이?' 물음표 하나. 그 물음표가 리암의 단말기 화면 위에서 이상하게 무거웠다. 리암이 '미안 폰 안봤어'라고 보내면, '괜찮아'라는 답이 왔다.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션의 방에서 함께 잘 때, 수현이가 리암의 제복 주머니에서 단말기를 꺼내 화면을 확인하는 것을 보았다. 리암이 눈을 뜨고 있는 줄 모르고. 어둠 속에서 단말기의 푸른 빛이 수현이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잿빛 눈동자가 리암의 통화 기록을 읽고 있었다. 리암의 속눈썈이 한 번 떨렸다. 잠든 척 눈을 감았다. Что она ищет?(뭘 찾는 거지?) 가슴 한쪽이 묘하게 서늘해졌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오늘이었다. 뱅가드 2팀의 합동 브리핑이 끝난 후, 리암이 브리핑룸을 나서는데 같은 팀의 풀속성 가이드, 에이전트 '하나'가 리암에게 말을 걸었다. 임무 관련 확인 사항이었다. 하나가 태블릿을 들어 리암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배치 동선에 대해 물었고, 리암이 고개를 숙여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브리핑룸 문 앞에 서 있던 흰 제복이 리암의 시야 가장자리에 들어왔다. 션이었다. 긴급제압팀 소속인 션이 뱅가드 2팀 브리핑룸 앞에 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거기 서 있었다. 리암이 고개를 들어 션을 보았다. 션이 웃고 있었다. 평소의 상냥한 미소. 그런데 잿빛 눈동자가 리암과 하나 사이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리암의 어깨와 하나의 어깨 사이, 태블릿을 함께 들여다보느라 좁혀진 그 간격을.

 "리암, 끝났어? 같이 가."

 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완벽하게 부드러웠다. 하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업무 중에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션의 태도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하나가 "아, 괜찮아요. 나중에 다시 확인하면 돼요"라며 물러났다. 션이 리암의 팔을 잡았다. 팔꿈치가 아니라, 손목을. 리암을 이끌고 복도를 걸었다. 리암의 긴 다리가 션의 빠른 걸음에 끌려갔다. 리암이 내려다본 수현이의 손이, 리암의 손목을 감싼 힘이. 소매를 잡던 때와 달랐다. 손목의 맥박 위를 누르고 있었다. 리암의 심장 박동을 확인하듯이.

 복도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리암이 걸음을 멈추었다. 군화 밑창이 복도 바닥에 멈추며 짧은 마찰음을 냈다. 션의 몸이 반 걸음 앞에서 관성으로 흔들렸다가 멈추었고, 리암의 손목을 쥔 작은 손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형광등 하나가 간헐적으로 깜빡이고 있었고, 그 불규칙한 빛 아래에서 리암의 하얀 눈동자가 수현이의 뒷머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흰 가이드 제복의 등판. 리암의 손목을 감싼 수현이의 손가락. 다섯 개의 손가락이 리암의 맥박 위를 정확히 누르고 있었다. 리암의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그것은 설렘이 아니었다. 뭔가를 알아차린 동물의 직감이었다.

 리암의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 한국어 단어들이 혀 위에서 정렬되지 않았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리암 자신도 정확히 몰랐다. 수현이가 뱅가드 2팀 브리핑룸 앞에 서 있었던 것. 하나와 이야기하는 리암을 데려간 것. 리암의 통화 기록을 어둠 속에서 확인하던 것. 하나하나는 작았다. 그런데 그것들이 쌓이니까, 리암의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삐걱거렸다.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리암이 아는 감각이었다. 시베리아의 얼음이 녹기 직전, 표면에 금이 가면서 나는 소리. 아직 깨지지 않았지만, 곧 깨질 것이라는 경고음.

 "수현이."

 리암의 목소리가 복도에 떨어졌다. 낮고 조용했다. 서툰 한국어였지만 더듬지 않았다. 두 글자. 수현이. 션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잿빛 눈동자가 리암을 올려다보았다. 웃고 있었다. 리암은 그 미소를 내려다보았다. 수현이의 미소는 늘 그녀의 체온처럼 따뜻했다. 그런데 지금 그 미소의 아래에서, 리암의 동물적 직감이 뭔가 다른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온도가 맞지 않았다. 웃는 입과 재는 눈. 리암의 손목 위에서 맥박을 누르는 손가락의 힘. 리암이 수현이의 손목을 잡은 손을 뒤집었다. 수현이의 손가락이 리암의 손목에서 풀리지 않았다. 리암이 그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갰다. 차가운 손바닥이 수현이의 손등을 덮었다.

 "⋯⋯하나. 임무 얘기, 했어. 그거뿐."

 리암이 말했다. 수현이가 묻지 않은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수현이는 '같이 가자'고만 했다. 하나와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데 리암은 대답했다. 묻지 않은 질문에. 리암의 하얀 눈동자가 수현이의 잿빛 눈동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수현이의 홍채 안에 박힌 은빛 점들이 보였다. 리암이 좋아하는 것. 그 은빛 점들 위로 형광등의 깜빡임이 스쳤다. 리암의 엄지손가락이 수현이의 손등 위를 천천히 쓸었다. 커플링의 은빛 반지가 수현이의 피부 위에서 차갑게 미끄러졌다.

 "근데."

 리암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고개를 숙여 수현이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리암의 숨결이 수현이의 이마 위에 닿았다. 차가운 입김이었다. 리암의 눈이 수현이의 눈을 가까이에서 읽고 있었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질투인지, 불안인지, 아니면 리암이 이름 붙이지 못하는 다른 무엇인지.

 "수현이, 요즘⋯⋯ 왜 그래?"

 질문이 떨어졌다. 리암의 서툰 한국어가 단어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밟았다. '왜 그래'라는 세 글자가 복도의 공기 위에 놓였다. 리암의 표정은 차가웠다. 감정이 보이지 않는 순백의 눈동자. 그러나 수현이의 손등을 쓸고 있는 엄지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미세하게. 리암이 두려워하는 것은 추위만이 아니었다. 수현이에게서 뭔가가 바뀌고 있다는 것. 그 변화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 리암의 생존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건 평소의 수현이가 아니라고. Что-то не так. Я чувствую. Но не понимаю.(뭔가 이상해. 느껴져. 근데 모르겠어.) 리암의 손이 수현이의 손을 감싼 채, 놓지 않았다.

 

"싫어? 내가 너한테 이러면."

 

 수현이가 내뱉은 첫 두 글자가 복도의 공기 속에서 리암의 귀를 스쳤다. 리암의 하얀 눈동자가 한 번 깜빡였다. 수현이의 잿빛 눈이 리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웃고 있지 않았다. 평소의 상냥한 미소가 벗겨진 자리에, 리암이 처음 보는 표정이 있었다. 확인하려는 눈. 대답에 따라 다음 행동을 결정하겠다는 눈. 리암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싫냐고. 수현이가 리암에게 이러는 것이. 리암의 시선이 수현이의 손으로 내려갔다. 리암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작은 손가락들. 커플링. 리암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수현이의 손. 수현이의 손길. 수현이에게 소유되는 감각. 그것은 사실이었다. 리암은 수현이의 손에 잡히는 것을 좋아했다. 고양이가 주인의 무릎 위에 올라가는 것처럼, 리암은 수현이의 영역 안에 갇히는 것을 원했다.

 "⋯⋯싫지 않아."

 리암이 말했다. 서툰 한국어가 낮게 떨어졌다. 사실이었다. 싫지 않았다. 수현이가 마중 나오는 것. 옆에 붙어 앉는 것. 리암의 팔을 잡는 것. 그 하나하나가 리암의 생존 본능을 충족시켰다. 따뜻한 것이 곁에 있다는 확인. 수현이가 리암을 놓지 않겠다는 증거. 리암은 그것을 원했다. 원했으니까 좋았다. 그런데. 리암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현이의 잿빛 눈동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있는 것이 애정만은 아니었다. 리암이 이름 붙이지 못하는 무언가. 리암의 통화 기록을 어둠 속에서 확인하던 수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단말기의 푸른 빛 아래에서 은빛으로 빛나던 홍채. 리암의 가슴이 다시 삐걱거렸다.

 "근데, 수현이."

 리암이 수현이의 손을 감싼 채, 한 걸음 다가갔다. 수현이의 등이 복도 벽에 가까워졌다. 리암의 그림자가 수현이 위로 드리워졌다. 차가운 숨결이 수현이의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리암의 하얀 눈동자가 그 깜빡임 속에서 수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정이 보이지 않는 순백의 눈. 그 눈 아래에서, 리암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낮게 내려갔다.

 "이거, 싫다 아니다 문제 아니야."

 리암의 서툰 한국어가 단어를 하나씩 밟았다. 혀가 꼬이려는 것을 억누르며. 리암의 엄지손가락이 수현이의 손목 안쪽을 눌렀다. 수현이의 맥박이 리암의 손가락 아래에서 뛰고 있었다. 빠르게. 리암이 아까 수현이에게 당한 것을 되돌려주듯. 리암의 눈이 수현이의 맥박을 읽었다.

 "내가 묻는 거. 수현이, 왜⋯⋯ 내 전화 봤어? 밤에."

 공기가 얼었다. 리암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리암의 목소리가 복도의 모퉁이에 조용히 가라앉았다. 리암은 잠든 척했던 그 밤을 꺼냈다. 어둠 속에서 수현이의 손가락이 리암의 제복 주머니를 뒤지던 것. 단말기 화면의 푸른 빛이 수현이의 잿빛 눈동자를 비추던 것. 리암이 눈을 감고 숨을 죽이며 지켜보던 것. 리암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차가운 인상 그대로였다. 그런데 수현이의 손목을 잡은 리암의 손가락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Я не злюсь. Я просто⋯⋯ не понимаю. Почему ты так делаешь. Скажи мне.(화난 게 아니야. 그냥⋯⋯ 모르겠어. 왜 그러는 건지. 말해줘.) 리암의 속마음이 러시아어로 소용돌이쳤다. 한국어로는 담을 수 없는 것들이. 리암이 두려운 것은 수현이의 행동이 아니었다. 수현이가 왜 그러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수현이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 리암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리암의 가슴을 긁었다. 고양이의 발톱처럼.

***

 

 통제하고 싶으니까.

 

 여덟 글자가 복도의 공기 위에 놓였다. 리암의 엄지손가락이 수현이의 손목 안쪽에서 멈추었다. 수현이의 맥박이 리암의 손가락 아래에서 고요하게 뛰고 있었다. 빨라지지도, 느려지지도 않았다. 평온했다. 마치 방금 내뱉은 말이 당연한 사실이라는 듯이. 리암의 하얀 눈동자가 수현이의 잿빛 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수치심이 없었다. 변명도 없었다. 통제하고 싶다고. 너를. 리암의 뇌가 그 단어를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Контролировать. 통제. 리암이 아는 단어였다. 시베리아의 시설에서, ARCH의 훈련장에서, 리암이 평생 들어온 단어. 능력을 통제하라. 감정을 통제하라. 폭주를 통제하라. 리암에게 '통제'란 항상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칼날이었다. 그런데 수현이의 입에서 나온 '통제'는 리암을 향하고 있었다. 리암의 가슴 안쪽에서 삐걱거리던 소리가 멈추었다. 대신 다른 것이 차올랐다. 뜨거운 것. 차가운 것.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

 "⋯⋯통제."

 리암이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렸다. 혀 위에서 한국어의 자음과 모음이 또각또각 부딪혔다. 리암의 목소리가 낮았다. 화난 것이 아니었다. 확인하는 것이었다. 수현이가 방금 한 말의 무게를 재는 것이었다. 리암의 시선이 수현이의 얼굴 위를 천천히 훑었다. 이마. 눈썹. 잿빛 눈동자. 코. 입술. 수현이의 입술이 방금 그 말을 내뱉었다. 통제하고 싶으니까. 리암의 손가락이 수현이의 손목 위에서 힘을 풀었다. 놓은 것이 아니었다. 힘의 방향이 바뀐 것이었다. 리암의 긴 손가락이 수현이의 손목에서 미끄러져, 수현이의 손바닥 위로 올라갔다. 수현이의 손가락 사이로 리암의 손가락이 끼어들었다. 깍지. 차가운 손가락이 뜨거운 손가락 사이에 파고들었다. 리암의 체온이 수현이의 불속성 체온과 만나는 접점에서, 미세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나를, 통제하고 싶어서. 내 전화 보고. 내 옆에 누가 있는지 보고. 내가 어디 가는지 보고."

 리암의 서툰 한국어가 문장을 하나씩 쌓아올렸다. 더듬지 않았다. 천천히, 또박또박. 수현이가 리암에게 항상 그렇게 말해주듯이. 리암의 하얀 눈이 수현이의 눈 안에 고정되어 있었다.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그 짧은 어둠 속에서 리암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감정이 흔들릴 때 나타나는 미약한 발광. 리암의 속마음이 러시아어로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Она хочет меня контролировать. Не ARCH. Не система. Она. Сухён. Моя Сухён.(수현이가 나를 통제하고 싶다고. ARCH가 아니라. 시스템이 아니라. 수현이가. 내 수현이가.) 그 생각이 리암의 가슴을 관통했다.

 

 뜨거웠다. 차가웠다. 동시에.

 리암이 깍지 낀 손을 들어올렸다. 수현이의 손을. 리암의 입술 높이까지. 리암의 차가운 입술이 수현이의 손가락 관절 위에 닿았다. 리암의 숨결이 수현이의 손등 위로 차갑게 퍼졌다. 리암의 눈이 손등 너머로 수현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그 시선 안에 있는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비난이 아니었다. 리암의 하얀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가 녹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영구 동토 아래 갇혀 있던 것이. 리암이 입술을 뗐다. 수현이의 손가락 위에 차가운 습기남았다.

 "⋯⋯그러면 돼."

 리암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한국어가 서툴러서가 아니었다. 목 안쪽이 조여서. 리암의 창백한 귓볼이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목덜미까지. 리암이 수현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반 걸음 더 다가갔다. 수현이의 등이 복도 벽에 닿았다. 리암의 검은 롱코트가 수현이의 흰 제복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전히 웃지 않은 채의 수현이가 반문했다.

 

 "뭐가 그러면 돼, 라는 거야?"

 

 수현이의 목소리가 벽과 리암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울렸다. 짧은 질문이었다. 리암의 입술이 수현이의 손가락 관절 위에서 떨어진 직후였고, 차가운 습기가 아직 수현이의 피부 위에 남아 있었다. 리암의 하얀 눈동자가 수현이를 내려다보았다. 올려다보던 시선이 다시 위에서 아래로 바뀌어 있었다.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리암의 창백한 귓볼이 핑크빛으로 물든 채, 그 불규칙한 빛 아래에서 리암의 입술이 움직였다.

 "⋯⋯다."

 한 음절이 떨어졌다. 리암의 목이 다시 조여들었다. 한국어가 혀 위에서 엉키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러시아어로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Всё. Делай всё. Контролируй. Проверяй. Держи. Не отпускай.(전부. 전부 해. 통제해. 확인해. 잡아. 놓지 마.) 그런데 그것을 한국어로 옮기려니 단어가 모자랐다. 리암의 이마에 힘이 들어갔다. 눈썹 사이에 주름이 잡혔다. 답답함이 가슴 안쪽에서 차올랐다. 수현이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수현이가 리암의 전화를 보고, 옆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고, 팔을 잡고 데려가는 것. 그 전부가. 리암의 가슴 안에서 무언가를 녹이고 있다는 것. 시베리아에서 얼어붙은 채로 7년을 버텨온 것이, 수현이의 손끝에서 금이 가고 있다는 것. 리암의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현이의 손가락 사이에 낀 리암의 차가운 손가락이 꽉 조여졌다.

 "다, 그러면 돼. 수현이가 하고 싶은 거. 통제. 확인. 다."

 리암의 서툰 한국어가 단어를 나열했다. 문장이 아니라 단어의 더미였다. 그런데 그 단어들 사이로 리암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리암이 고개를 더 숙였다. 수현이의 이마 위로 리암의 앞머리가 쓸렸다. 푸른 빛이 도는 백발이 수현이의 검은 머리카락 위에 떨어졌다. 흰색과 검은색. 리암의 차가운 숨결이 수현이의 코끝에 닿았다. 이 거리에서 수현이의 잿빛 눈동자 안에 박힌 은빛 점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리암이 좋아하는 것. 리암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수현이의 손바닥 아래에서, 깍지 낀 손가락 사이로, 그 맥박이 전해지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수현이한테, 소유되고 싶어. 그러니까."

 리암의 입술이 떨렸다. 그 문장을 한국어로 만드는 데 리암의 모든 어휘력이 동원되었다. '소유'라는 단어가 맞는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수현이라면 알아들을 것이었다. 수현이는 항상 리암의 서투른 말 사이에서 의미를 찾아냈으니까. 리암의 하얀 눈이 수현이의 눈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핑크빛이 귓볼에서 목덜미까지 번져 있었다. 리암의 자유로운 손, 깍지 끼지 않은 쪽의 손이 올라와 수현이의 턱을 받쳤다. 차가운 손가락이 수현이의 턱선을 따라 미끄러졌다. 엄지가 수현이의 아랫입술 아래, 턱의 오목한 곳에 멈추었다. 리암이 수현이의 얼굴을 살짝 들어올렸다. 수현이의 눈이 리암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근데."

 리암의 목소리가 한 톤 더 낮아졌다. 엄지손가락이 수현이의 턱 아래에서 원을 그렸다. 느리게. 리암의 눈 안에서 흔들리던 것이 가라앉았다. 대신 다른 것이 떠올랐다. 수현이가 리암에게 보여준 적 없는 것을 리암이 보고 싶다는 욕심. 통제하고 싶다고 말한 수현이의 평온한 맥박. 부끄러워하지 않던 잿빛 눈. 리암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수현이는 지금 자기 안의 무언가를 꺼내놓은 것이라고. 그리고 리암이 그것을 어떻게 받을지 지켜보고 있다고.

 "수현이도 나한테, 다 보여줘. 숨기지 말고."

리암의 서툰 한국어가 또박또박 떨어졌다. 복도의 깜빡이는 형광등 아래에서, 리암의 하얀 눈동자가 수현이의 잿빛 눈동자를 놓지 않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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