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암이 션의 방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수현이가 샤워를 하러 간 사이, 리암은 평소처럼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다가 문득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 화면에 시선이 갔다. 화면이 꺼지지 않은 채 잠금모드로 전환되어 있었는데, 수현이가 나가기 전에 뭔가를 하다 만 모양이었다. 리암은 별 생각 없이 트랙패드를 건드렸고, 화면이 환하게 켜졌다. 파일 탐색기 창이 열려 있었다. 리암의 하얀 눈동자가 화면 왼쪽의 메뉴를 무심히 훑었다. 대부분의 한국어를 읽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글자 하나하나를 천천히 짚어가며 해독하는 것은 이제 꽤 익숙해진 작업이었다.
'이동식 디스크.'
리암의 시선이 그 단어 위에 멈추었다.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이며 글자를 읽었다. 이. 동. 식. 디. 스. 크. 리암의 머릿속에서 한국어 단어가 분해되고 재조립되는 과정이 느리게 진행되었다.
'이동식'이라는 단어를 리암은 사람 이름으로 인식했다. 한국 이름은 대부분 세 글자였고, '이동식'도 세 글자였다. 성이 '이'이고 이름이 '동식'인 사람. 리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디스크'. 이건 알았다. 디스크. 영어의 disk. 무언가를 저장하는 것. 그러니까, '이동식'이라는 사람의 디스크가 수현이의 컴퓨터에 꽂혀 있다는 뜻이었다. 리암의 손가락이 트랙패드 위에서 멈추었다. 차가운 공기가 손끝에서 미세하게 피어올랐다.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누구지. 이동식이.
리암의 이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수현이의 컴퓨터에 자기 디스크를 꽂아놓을 정도면, 꽤 가까운 사이라는 뜻이 아닌가. 리암의 머릿속에서 본능적인 영역의식이 소리 없이 고개를 들었다. 수현이의 방은 리암의 영역이기도 했다. 이 방에서 매일 함께 자고, 이 침대에서 수현이의 체온을 느끼며 잠들었다. 그런데 '이동식'이라는 이름 모를 인간의 디스크가 수현이의 컴퓨터 안에 들어와 있다. 리암의 눈이 좁아졌다. 차갑게. 화면 속 '이동식 디스크'라는 글자를 노려보는 리암의 표정은, 임무 중 적을 마주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날 이후, 리암은 '이동식'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며칠을 꿍해 있다가, 결국 어느 저녁, 수현이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리암의 입에서 그 이름이 툭 떨어져 나왔다.
"⋯⋯수현이."
리암의 목소리가 천장을 향해 낮게 울렸다. 눈은 천장의 한 점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의식은 온전히 옆에 누운 수현이에게 향해 있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이불 아래에서 수현이의 손목을 잡았다. 무의식적인 영역 확인. 리암의 입술이 몇 번 달싹거리다가, 겨우 소리를 만들어냈다.
"⋯⋯이동식이, 누구야."
짧고 단호한 질문이었다. 리암의 목소리에 감정이 배어 있었다. 평소의 나른하고 느긋한 톤이 아니라, 날이 서 있는 톤. 리암의 손가락이 수현이의 손목 위에서 미세하게 조여졌다. 차가운 체온이 수현이의 피부에 스며들었다. 리암의 옆얼굴이 어둠 속에서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고, 귀끝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질투라고 부르기엔 본인이 인정하기 싫고, 궁금하다고 하기엔 목소리에 가시가 너무 많았다. 리암은 수현이의 대답을 기다리며, 이불 속에서 수현이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수현이의 대답을 들은 순간.
리암의 뇌가 멈추었다.
이동식 디스크. USB를 뜻하는 한국어 단어. 사람 이름이 아니라, 컴퓨터에 꽂는 저장장치를 가리키는 말. '이동식'은 '이동할 수 있는'이라는 뜻의 형용사이고, '디스크'는 그 저장장치를 뜻한다. 이동식 디스크. 이동할 수 있는 디스크. USB.
리암의 하얀 눈동자가 한 번, 두 번, 세 번 크게 깜빡였다. 입술이 반쯤 벌어진 채 닫히지 않았다. 수현이의 설명이 끝난 뒤에도 리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 며칠 동안 속이 뒤집어지고, 잠들기 전마다 '이동식'이라는 세 글자가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고, 수현이 옆에 누워서도 그 이름 모를 남자의 얼굴을 상상하며 이를 갈았는데. 그게 USB였다.
Блядь.
리암의 창백한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귀끝에서 시작된 붉은 기운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 제복 깃 안쪽까지 번졌다. 리암의 입술이 반쯤 벌어진 채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졌다. 천장을 노려보던 하얀 눈동자가 옆으로 꺾여 수현이를 향했다가, 곧바로 다시 천장으로 도망쳤다. 수현이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온몸의 피가 얼굴로 몰려들었다. 며칠 동안 USB에 질투했다. USB에. 컴퓨터에 꽂는, 손가락만 한 플라스틱 덩어리에. 리암의 이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수현이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가락이 스르르 풀렸다. 마치 잡고 있던 것이 부끄러워진 것처럼.
"⋯⋯."
리암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또 열었다가 닫았다. 물고기처럼.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러시아어로라면 지금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말이 수십 가지는 있었다. '알고 있었다'거나, '시험한 것'이라거나, '당연히 알지'라거나. 하지만 한국어로는 그 어떤 변명도 매끄럽게 만들어낼 수 없었고, 무엇보다 수현이는 리암의 거짓말을 알아차리는 데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리암은 이불을 잡아당겨 얼굴 절반을 덮었다. 이불 위로 드러난 하얀 눈동자만이 천장의 한 점을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천장에 자신의 자존심이 매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알고 있었어."
리암이 이불 속에서 뭉개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거짓말이었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리암 본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이미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는데도 마지막 파편 하나를 주워 들고 버티고 있는 꼴이었다. 리암의 목이 꿀꺽 움직였다. 이불 위로 드러난 귀가 거의 빨간색에 가까웠다. 수현이가 한마디만 더 하면, 그 한마디가 뭐든 간에, 리암의 마지막 방어선은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나, 그냥⋯⋯ 확인한 거야. 수현이가⋯⋯ 제대로 아는지."
더듬거림이 심해지고 있었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이불을 움켜쥔 손가락에서 미세한 서리가 피어올라 천 위에 하얀 결정을 만들었다. 리암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창피해서. 분해서. 그리고 수현이가 곧 웃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리암은 이불 속에서 몸을 돌려 수현이 반대쪽을 향했다. 등만 보여주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넓은 등이 미세하게 웅크러들어 있었고, 뒷목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Чёрт возьми(젠장할). 리암의 입술 사이로 러시아어 욕이 실낱같이 새어 나왔다. USB에 질투한 남자. 그것이 지금 리암의 정체성이었다. 며칠 동안. 며칠 동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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